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가끔 살아온 날을 돌이켜 볼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억은 사람과 연관된 기억들이라서 날짜나 그 당시의 날씨 등 아주 구체적인 기억들은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되었지만 거의 하루 대부분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 날이 있습니다.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침부터 밤까지 생생히 기억이 나는 그날.
바로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분들에게 굳이 그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니 말로 다 설명할 자신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군요. 아무튼 그때는 국민과 정부 사이가 무척 안 좋았습니다. 아마 지금과 비교하면 한 1000배쯤 사이가 벌어져 있었을까요?
저는 87년에 대학을 입학했습니다.
한참 새내기로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자유를 만끽할 시기에 학교는 그다지 자유와 낭만이 넘치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입학도 하기 전에 떠들썩했던 서울대 생
<사진 출처: 인터넷 6월항쟁기념관>
그러던 중 5월이 지나면서 각계 시민단체로 구성된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운동본부]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릴 예정인 6월 10일을 대규모 전국적 저항의 날로 계획하였고 서울에서는 시청 앞 광장이 집회장소로 결정되었습니다.
정국은 극도로 긴장됐고 공공연히 계엄령이나 위수령이 선포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경찰은 6월 7일부터 서울시 전역에서 검문검색을 강화했고 갑호 비상령이 발동되었으며 인쇄소와 학교에 압수수색을 대대적으로 펼쳤습니다.
드디어 6월 10일 날이 밝았습니다.
잠실체육관에서
시청 전광판의 시계가
“우리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국민의 이름으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그분들이 국민 행동 시간인
대학생들은 오전에 과별, 학년별 토론을 통해 동맹휴업을 결의하였고 학교에서 우렁찬 출정식을 겸한 시위가 있었으며 시위가 끝난 후
저도 몇몇 친구들과 함께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여 경찰의 검문검색을 간신히 피해 시청 근처에 도착하였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거리 곳곳에 서있었습니다. 표정들은 무척 상기된 표정이었으며 마치 그어대기 직전의 성냥 알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서서히 한낮의 열기가 잦아들만한 시간. 그러나 거리의 열기를 증폭되어 갔습니다. 누군가의 시작인지는 모르지만 어느새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구호가 들려오더니 학생들이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시청 앞 집회는 경찰의 방해로 열리지 못한 채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6시30분쯤부터 최루탄을 쏘며 강제해산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냥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저도 시청역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다른 학생들과 달리던 중 청계천 입구쯤에서 경찰의 저지선에 막혔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보도블록을 깨트리기 시작했고 나의 손에는 어느새 돌이 들려 있었습니다.
얼마 후 경찰들은 최루탄을 쏘아대는 것으로 모자라 사복전투경찰, 일명 백골단을 투입했습니다. 백골단의 임무는 시위대의 체포입니다. 대열은 무너지고 흩어져버렸고 그때 뒤를 돌아보니 시청 쪽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이 최루탄 가스로 뒤 덮여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뒤로 도망가기를 포기하고 왼쪽 서울시 의회 옆 골목으로 들어가 성공회 성당으로 도망쳤습니다. 처음엔 성당 안으로 들어갔으나 실내에 있으면 안될 것 같아 주차장으로 다시 나와보니 어느새 주차장 안까지 백골단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완전 만화영화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차를 방패 삼아 몸을 숨기고 잠시 있다가 상황을 보려고 고개를 내미는 순간 경찰 하나가 저와 같이 차에 몸을 숨기고 고개만 내밀다가 저와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아마 나도 그렇지만 그 친구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숨는걸 포기하고 세워져 있던 차 위로 올라가 차들의 지붕 위를 통통 뛰면서 달리다가 낮은 담장을 멋지게 날리면서 나를 쫓아오는 경찰을 비웃었지만 그 생각은 정말 나만의 착각이었습니다. 몸이 담장을 넘어 떨어지는 순간에서야 담 옆으로 쭉 앉아있는 전경부대를 본 것입니다. 사복경찰 1명을 피하려다 1개 중대가 앉아있는 곳 한가운데로 도망가다니.
그 날 태어나서 20살 될 때까지 얻어맞은 것 보다 휠씬 더 맞은 구타를 당했고 남대문경찰서를 거쳐 마포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물론 경찰서는 아마 경찰들보다 잡혀온 학생들의 수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유치장에서 옷에 묻어온 최루탄 가스 때문에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도 나직이 함께 부르던 노래를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진 출처: 인터넷 6월항쟁기념관>
다음날 워낙 많은 수의 시위 학생들이 붙잡혀 정부는 여론의 악화를 막기 위해 대부분의 학생들을 석방키로 하여 집으로 돌아와 몸이 아파 꼬박 하루를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어머니는 한약방에서 매 맞은 데 좋다는 약을 지어오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6월 항쟁은
<사진 출처: 인터넷 6월항쟁기념관>
어쩌면 6월 항쟁이 시작된 6.10일은 우리 사회가 기존과는 전혀 다른 사회로 한 발짝 내디뎌 나가는 분수령이 된 날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를 최루탄에 잃었고 수많은 선배, 동료를 모진 곳으로 떠나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습니다. 20살이었던 저도 어느새 마흔 살이 되었고 그 뜨거웠던 광화문에서 거리가 한눈에 보이는 최신식 건물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대통령도 무섭지 않던 내가 나이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직장 상사의 꾸지람에 하루 기분을 망치기도 하며 무엇을 결정하는데 원칙보다는 관계를 우선하기도 합니다. 아마 허리둘레도 만만치 않게 늘어났을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변한 만큼 세상도 많이 변했습니다.
막걸리 집에서 대통령 흉만 봐도 잡혀가던 세상에서 지금은 골프가 맞지 않아도 대통령 탓이라고 우겨도 누가 뭐라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인권변호사 출신이 대통령이 되었고 청와대 비서실에는 운동권 출신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수출은 매년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고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돌파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의 나의 생활은 정말 만족스러운가? 정말 바꿔보려던 세상은 이러한 모습인가? 라는 질문을 누구에게 받는다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레 다리에 힘이 빠져 어디 앉을 곳을 찾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뤘지만 내용적 민주주의는 곳곳에서 좌절되고 있고 세계화와 양극화라는 새로운 도전에 합당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도 못합니다. 정작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전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학생을 비롯한 그 어떤 계층도 자기의 희생을 감수하려 하지 않습니다. 전체보다는 개인이 중시되고 개인의 행복이 사회적 진보보다 더 우선시 되는걸 당연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시청 앞 광장에서는 기념행사가 열린다고 합니다. 저는 정말 꼭 그 행사에 가보고 싶습니다.
대학동창들끼리 오랜만에 모여 노래를 부르며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 마시고 싶습니다. 하지만 진짜 그날 원하는 것은 어쩌면 이미 사회적 변화를 불안해하는 기득권이 되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에 답을 찾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지난 20년을 잘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의 20년을 잘 설계하는 것 또한 중요할 것입니다. 나의 삶을 사회적 비전과 완벽하게 통일시키진 못할지라도 최소한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 발전을 저해하는 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희망을, 열정을 찾고 싶은 건지도 모릅니다.
<사진 출처: 인터넷 6월항쟁기념관>
6월 항쟁 20주년.
뜨거웠던 그 날을 함께 했던 수많은 학생들, 박수를 치고 휴지를 던져주었던 넥타이 부대들, 시위대를 가게에 숨겨주고 물을 떠와 목을 적셔주던 아주머니들, 경적을 울리면서 격려와 응원을 보내준 기사님들, 시국선언을 통해 학생들을 지지해준 양심적 지식인들, 또 비상한 각오로 국민행동을 이끌었던 재야 인사를 비롯한 어르신들과 함께 추억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날을 함께 했던 모든 분들에게 마음으로 건투를 빕니다.